[이은주/판칼럼] 대화와 소통 #2. 소통력을 높이면 기대할 수 있는 변화

서울시공익활동지원센터 2023.11.15조회 495스크랩 0

대화와 소통 

#2. 소통력을 높이면 기대할 수 있는 변화


서울시공익활동지원센터, 2023.11.1.

이은주 | 와이즈서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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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와이즈서클 대표는 '대화와 소통'을 주제로 4편의 '판 칼럼'을 연재합니다. 두 번째 글에서는 서로의 소통, 소통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1. 소통은 왜 필요한 걸까

#2. 소통력을 높이면 기대할 수 있는 변화

#3. 대화는 생각이 아닌 '마음의 일치'를 위한 것

#4. 더 나은 민주 사회를 위한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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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을 위하는 일에 관심 갖고 액션을 벌이는 활동가의 감수성으론 ‘옳은 것’과 ‘그른 것’이 더 분명하게 순식간에 캐치 되는 것 같다. 좀 더 우리 사회를 나아지게 하려는 의도와 그러한 열망을 품은 채 주변을 마주하다 보면 사실 많은 것들이 불편하고 불만스럽기 마련인데, 여담이지만 디자이너인 내 남편도 그런 맥락에서 보면 비슷한 면이 있다. 그는 시선이 닿는 곳들이 비율이나 색감, 정돈된 정도 등에서 완벽하게 아름답지 않으면 고통스러워한다. 무언가를 볼 때마다 개선 방안이 끊임없이 머릿속에 떠올라서 눈 뜨고 있는 대부분의 시간이 피곤하다고 한다.

그런데 망치를 들고 있는 사람에게는 온통 박아야 할 못만 보이는 것처럼, 그러한 훌륭한 스킬을 자칫 엉뚱한데다가, 혹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용하는 자도 있는 것 같다. 누군가가 자신이 요즘 좋아하는 것에 관해 한창 신이 나서 말하고 있으면 ‘그것을 좋아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는 식의 반응으로 그다음 말을 이어가는 것이다(좋아하는 것에 관해 공유하려는데, 암묵적 메시지가 그 내용을 잡아먹어 버렸다). 자신이 행하고 생각하는 것만이 정답이라는 어필을 하면서 남의 이야기에 흠집을 낸다. 뭔가 이긴 것 같은 성취감을 느끼는 사이, 좋아하는 것에 관해 공유하려 말을 꺼냈다가 기분이 상한 상대는 금방 반격할 말을 고른다.


🤐 소통의 본래 목적을 잃을 때


소통이라는 수단을 통해 얻고자 하는 진짜 목적은 사라지고 ‘너도 당해봐라’ ‘상대를 넘어뜨리고 내가 이겨야겠다’는 식의 엉뚱한 목표가 우선시되는 소통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장면이 자주 연출되는 공간이 있다. 서로가 경쟁하려는 듯한 문화, 그래서 자신이 더 잘났다는 어필을 끊임없이 해야 하는 곳, 여기에 더해 통일된 의견이나 시각에 따르도록 암묵적인 강요가 있는 공간이라면 소통을 통해 애초에 얻으려던 것들을 많이 놓칠 것이다. 

조직 내의 언어문화만 10여 년 관찰해서 ‘부족의 성장에도 단계가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낸 기록 《부족 리더십》(한울, 2015)을 보면, 총 5단계로 나뉜 구분에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곳의 문화를 거울처럼 비추어 볼 수 있다. 

1단계는 서로를 약탈하며 ‘인생 뭐 같애’라는 극단적인 적대감을 표출하는 집단 형태이다. 2단계는 전 단계보단 안전하나 ‘내 인생 꼬였네’라는 말을 자주 하며 각 개인이 각자도생한다. 3단계는 함께 모이긴 하지만 상대를 끊임없이 깎아내리며 ‘나만 잘났어, 너는 아니야’ 하는 메시지를 꾸준히 던진다. 4단계에서는 좀 더 협력적인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우린 훌륭해, 저쪽은 아니고’라는 방식의 바탕 위에서 움직인다. 마지막 5단계는 모두가 ‘인생은 위대해’라는 식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자주 감사와 감탄을 표현하고, 자신들과 공명하는 상대라면 누구와도 연결되려 하며 최상의 팀을 형성해 인류 역사에 중대한 공헌을 남기려는 부족이다.

자신은 이 중 어느 단계의 문화를 더 자주 경험하는가? 존중과 협력은 집단 내에서만 존재하고 타 집단은 짓밟으려는 승자독식의 문화에 머무르지 않고, 그 어느 곳과도 손 잡으며 세상에 기여가 되는 존재이고자 하는 5단계 부족이 늘어난다면 우리 사회가 어떠한 모습으로 나아갈지 궁금해진다. 5단계 부족이 지닌 문화 쪽으로 한층 더 나아가려면 소통 방식에 있어 지금보다 어떤 부분에 더 주의를 기울이면 좋을까?




😣 잘못된 걸 잘못됐다고 말해도 될까?

다양한 지점들을 짚어볼 수 있겠으나 그중 하나, 피드백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자. 영어로 된 feedback은 우리말로 ‘되먹임’이라고 풀 수 있겠는데, 한쪽이 영향을 주면 그걸 받은 쪽이 해당되는 것에 영향을 끼치는 ‘상호작용’이란 뜻에 가까울 것이다. 결과적으로 더 나아지는 효과를 보기 위해 피드백 한다는 것인데, 어떤 피드백은 더 나아지도록 보태고 도우려는 의도가 있었어도 결과를 만드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악영향을 끼치는 경우도 발생하는 것 같다.
이런 식이다. 잘못을 지적하면 ‘아하! 그게 맞네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며 고마워하기보다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라며 기분 나빠 하거나 도리어 나를 공격하는 것이다. 뭐지? 이런 엉뚱한 결과는? 어디가 잘못된 거지? 공공장소에서도 조직 내에서도, 점점 잘못을 잘못이라 가리키지 못하는 상황이 늘어나는 것 같다. 고치고 변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남에게 지적을 받고 교정을 요구받는 일은 왜 그리 싫은 걸까?

😯 이성적 뇌가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여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메시지가 뇌에 입력되면 우리 뇌가 손과 발, 입을 향해 명령을 내려 그대로 움직여지면 좋을 텐데, 인간의 뇌는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 게 문제(?)라면 문제인 것 같다. 일단 뇌의 활동은 5퍼센트의 의식적 과정과 95퍼센트의 무의식적 과정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을 먼저 기억하자. 그리고 이렇게 엄청난 비율로 활동하고 있는 무의식의 뇌가 의식적 뇌와 어떤 방식으로 일하고 있는지도 살펴봐 둘 필요가 있겠다.
인간의 뇌는 보통 3층으로 이뤄져 있다고 본다. 신체적 생명 유지에 필요한 기능을 담당하는 ‘파충류 뇌’ 위에는 감정 기능을 담당하는 ‘구포유류 뇌’가 있고, 가장 윗부분에는 이성적 추론과 판단의 기능을 맡은 ‘신인류 뇌’가 자리 한다. 지금의 인간으로 진화하면서 공룡에게 있던 ‘도피-공격-얼어붙음’ 메커니즘으로 구성된 뇌도 함께 왔기 때문에 우리는 생존의 위협을 느끼면 몸부터 즉각 반응하여 생명을 보존할 수 있고, 감정이 반응하도록 하는 구포유류 뇌는 기존 경험을 통해 감각적으로 학습한 것을 기록해 놓는 방식으로 이전과 같은 고통을 겪지 않게 더 나은 선택으로 이끌어 주니 무척 고마운 역할자이긴 하다. 
그런데 뇌의 가장 겉 부분을 둘러싼 신인류 뇌는 애석하게도, 앞서 이 두 가지의 뇌가 자기가 관장하는 영역의 정보처리를 다 끝낸 다음에, 그러니까 외부 자극을 자기 선에서 다 소화한 다음에야 자신의 일을 한다고 한다. 짐승을 사냥하며 살던 때와는 다른 종류의 위협, 말하자면 죽을 것 같이 창피한 순간을 생존의 위협처럼 느끼면 먼저 ‘포유류 뇌’로부터 강렬한 자기 보호 반응이 나오며, 또한 기존에 경험했던 억울함이나 아픈 기억, 깊은 트라우마들이 당장에 닥친 상황과 연결되면 다시금 ‘구포유류 뇌’에 피어올라 강하게 존재를 끌어당기며 압도시켜 버린다. 이 두 관문을 통과한 후에야 이성적 뇌의 기능이 작동할 수 있다고 한다.



말을 주고받는 상황에서 상대가 도무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 같으면 궁금해져 본다. 지금 뭐가 그리 무서운 것일까? 과거 어떠한 강렬한 상처의 기억이 자기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걸까? 이분의 두뇌가 안정을 찾고 신피질 뇌가 작동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잠시 차분해질 수 있는 시공간? 깊은 공감의 경청 상대가 필요할까? 우리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 서로에게 기여가 되고 힘이 되는 동료 간의 피드백

그러니까 피드백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려면 상대가 그 메시지를 스스로 입력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졌는지를 먼저 확인하는 것이 좋겠다. 상대의 마음가짐도 중요하겠으나, 피드백을 주는 입장에서는 해당 내용을 전할 때 혹시 위협이나 창피함을 느낄 만한 질감과 색상의 트레이에 담아서 말하고 있는지, 지금의 주변 상황이나 맥락이 적절한 편일지 등을 살피는 것도 진중하게 고려해 볼 만한 방식이겠다.
우선 피드백을 주려는 자 스스로가 심적으로 편안하며 상대의 반응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는지도 확인해 보자. 여기에는 피드백에 담긴 자신의 의도를 진정 사랑하는지 자문하는 것이 포함된다. 지지하는 마음으로 상대에게 보탬이 되어주려는지 말이다. 그런 뒤 상대가 지금 다른 이의 견해에 경청할 시간과 심적 여유가 있는지를 확인한 후에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은데, 만일 없다면 생길 때 다시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좋고, 지금 당장 해야 한다면 날씨나 요즘 즐겨하는 것 등의 화제를 먼저 꺼내어 마음에 환기를 한번 시켜준다거나 지금 자기 마음의 상태가 어떠한지 표현해 줄 수 있는지를 살짝 물으며 소통을 시작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
앞서, 사랑하는지 자문해 본 자신의 피드백 의도를 먼저 꺼낸다면 훨씬 내용 수용력이 높아질 것이다. 그런 뒤 피드백 받는 이에게 자신에게서 어떠한 종류의 반응을 바라는지를 먼저 확인하는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도움받기를 원하세요? 고충이나 지금의 생각들을 가만히 듣고 공감해 주는 것까지? 제 느낌과 견해를 보태는 것도 괜찮습니까? 유사했던 경험이나 주변 사례를 말씀드리는 것은 어떻습니까?” 
소통하는 과정 중에는 상대의 말을 왜곡 없이 화자의 의도에 맞게 잘 듣고 있는지를 확인해 주는 것도 서로의 신뢰를 쌓아가는 토대가 되어주므로 좋다. ‘그러니까 염려되는 점이 000이란 말씀이시군요, 맞나요?’ ‘가장 찾고 싶은 실마리는 000라는 걸로 들리는데, 제가 잘 들은 건가요?’

🤗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드는 피드백

타인의 피드백으로 기분 좋은 변화, 자발적인 변화가 시작되는 것에 관하여 《조직의 재창조》(생각사랑, 2016)를 쓴 프레데릭 라루는 이러한 말을 남겼다. 

"우리는 마음이 사용하는 언어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타인들을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들어 왔다. 하지만 그것은 비극적인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평가는 결코 객관적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해 갖고 있는 주관적인 인상을 그 사람에 대한 ‘진리’로 변화시킨다. 객관적인 거리를 둔 채 우리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기보다, 우리는 관여된 상태에 있어야 한다. 타인의 말이나 행동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영감을 받았는지, 감동을 받았는지, 당황스러웠는지, 상처를 입었는지, 좌절했는지, 분노했는지를 공유하기 위해 ‘나’라는 언어로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 피드백은 객관적인 평가가 아니고 함께 탐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좀 더 많이 개방할수록, 우리가 피드백해 주는 파트너들도 좀 더 많이 개방하게 할 수 있다."(351쪽)

‘작년보다 더 성실해졌어’, ‘요즘 들어 생각이 좀 딴 데 있는 것 같아’ 하는 식의 판단이 들어간 표현들은 듣는 이로 하여금 ‘좋은 이야기, 나쁜 이야기’ 정도로 인식되는 것에서 그칠 수 있다. 그리고 심판하는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에 충분한 신뢰의 마음이 가지 않을 수 있다. ‘이 부분은 계속 발전시키고 그 부분은 다르게 바꾸어야겠구나’ 하는 자발적 배움으로 이어지는 피드백을 원한다면, 상대로부터 어떤 판단이 들 때 그 말을 뱉기 전에 스스로 먼저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의 구체적인 어떠한 말과 행동에서 나는 그런 것을 느꼈을까? 어느 지점에서 내가 무슨 영향을 받은 걸까? 
그런 뒤 이렇게 바꾸어 말해본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00씨가 맡은 부분이 세세하게 챙길 것이 참 많았던 걸로 아는데 빠짐없이 일일이 체크해 주어서, 같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나로서는 얼마나 든든하고 고마웠는지 몰라. 의외의 부분에서 뭔가가 빠질까 봐 좀 긴장되고 조바심과 걱정이 요즘 있었거든. 자네의 세세한 확인 절차가 큰 도움이 되었어.” 

“지난 회의 때 제가 요청한 내용은 000이었는데 이 부분은 그것과 조금 달라요. 아까는 제가 부르는데 못 듣고 뭔가를 고민하는 듯한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서 더욱 마음이 쓰이더군요. 이 일을 같이 진행하는 멤버로서 주어진 시간 안에 일이 순탄히 흘러가길 바라는데, 제 요즘 마음이 아슬아슬해요. 혹시 우리가 알면 좋을 어떤 개인 사정이나 고민이 있다면 말해줄 수 있을까요? 직접적 도움이 못 되더라도 서로 배려하는 방식으로 일을 진행시키면 어떨까 해요. 그럴 때 더 안심되고, 서로가 더 신뢰하는 마음으로 일하면 만족스러운 결과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판단의 언어보다는 영향받은 것에 관한 감사와 기쁨, 아쉬움과 염려 등의 마음 언어로 메시지를 전달하였을 때 상대에게 스스로가 위험하지 않다는 인지와 함께 배움이 일어날 여지를 더 많이 제공해 줌과 동시에, 다음에 이를 적용해 보는 학습의 선순환까지도 기대해 볼 수 있을 거라 본다.

🤓 우리 사회를 향한 피드백은 어떻게 안전하게 효과적으로?

그렇다면, 학습의 선순환이 살아 있는 우리 사회를 만들기 위해선 어떠한 방식의 피드백이 유용할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공익활동가는 사회를 향해 끊임없이 피드백한다. 기득권을 지닌 누군가가 혹은 어떠한 시스템으로 인하여 피해를 보는 존재들이 있을 때, 정당하지 않거나 공평함을 잃은 부분을 지적해야 할 때, 반드시 막아야 하는 악법이나 정책 그리고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하면 좋을 문화나 제도가 눈에 띌 때 그것을 이야기하고 바로잡으려 한다. 
피드백 받은 상대 쪽이 잘못된 일을 짚어주어 고마워하고, 제시해 주는 대안책이나 해법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는 효과적인 말 걸음이 되려면 어떠한 여건이 필요할까? 그리고 어떠한 모양새를 갖추는 게 도움 될까? 사회 변화를 함께 도모하는 자리가 서로가 신뢰를 주고받는 안전한 소통의 장으로 펼쳐지고, 그 안에서 변화를 향한 지혜의 나눔이 활발하게 이뤄질 수 있기 위해서 어떠한 접근과 말 걸기가 좋을지 고민해 보게 된다. 이는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누고픈 고민이기도 하다. (끝)


* 이 글은 서울시공익활동지원센터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