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주/판칼럼] 대화와 소통 #3. 대화는 생각이 아닌 ‘마음의 일치’를 위한 것

서울시공익활동지원센터 2023.11.21조회 335스크랩 0

대화와 소통

#3. 대화는 생각이 아닌 '마음의 일치'를 위한 것


서울시공익활동지원센터, 2023.11.1.

이은주 | 와이즈서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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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와이즈서클 대표는 '대화와 소통'을 주제로 4편의 '판 칼럼'을 연재합니다. 세 번째 글에서는 대화는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1. 소통은 왜 필요한 걸까

#2. 소통력을 높이면 기대할 수 있는 변화

#3. 대화는 생각이 아닌 '마음의 일치'를 위한 것

#4. 더 나은 민주 사회를 위한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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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의사소통 중에서도 ‘대화’를 다뤄보고자 한다. 대화란 무엇일까? 어쩌면 찬반 토론과 논쟁 비슷한 것들을 먼저 떠올릴 수도 있겠다. 우리편 견해에 가능한 한 많은 논거를 제시하여 상대편 논리가 얼마나 부족하고 어리석은지를 반복하여 강조하는 장면 말이다. 대화보단 토론 수업이나 찬반 논쟁에 대한 경험이 훨씬 많아서일까? 

이번 글에서는 탁구 경기처럼 상대가 받기 어렵게 공을 세게 치고 또 마찬가지로 세게 날아오는 공을 어렵게 받아내는 그러한 모습의 대화가 아닌, 각자의 경험과 생각을 담은 이야기들이 연결되어 하나의 아름다운 조각보로 꿰어지는 대화, 다양한 선들이 모여 강철도 뚫어내는 레이저 같은 강력한 파워를 지닌 모습으로 빗댈 수 있는 대화에 관하여 잠깐 들여다보기로 하자.


🧑‍🤝‍🧑대화는 경쟁 아닌 협력의 일환


그간 우리 사회에 개인주의보단 집단주의가 더 강해 왔어서 그런지, ‘협력’을 주제로 사람들을 만날 때 ‘내가 바라거나 생각하는 것들이 좀 더 실현될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하는 마음보다는 ‘전체를 위해 내 것을 또 접어야겠구나’ 하는 포기의 마음을 먼저 갖는 모습을 더 많이 보았다. 그렇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의 견해와 선호를 버리는 경험이 반복되면 협력에 관해 왜곡된 이해와 배움을 갖게 되고 하기 싫은 게 되고 만다. 비단 아쉬운 게 이것만 있는 게 아니다. 각자가 좌절하고 괴로워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유익할 수 있는, 전체를 위한 지혜를 얻는 상황들과 점점 더 멀어질 수 있다는 점도 있다.

‘협력적 대화’는 해보면 상상 이상으로 재밌다. 서바이벌처럼 하나의 의견만 남기고 나머지들을 없애고 무너뜨려야 끝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모든 의견을 조합해볼까 하는 호기심과 기대감이 담긴 일종의 놀이가 된다. 각자의 해답을 한데 이어 붙인 데 더하여 함께 만들어 내는 지혜가 출현하게 되는데, 이때는 자신이 전체의 일부이면서도 곧 전체인 것 같은, 나와 너는 별개라는 느낌이 현저히 사라지는 아주 오묘한 느낌이 들곤 한다.


🫶‘생각’의 일치 아닌 ‘마음’의 일치


협력적 대화를 경험하시면 이러한 말씀들을 해주신다. “하나의 결론, 하나의 생각으로 모으는 게 협력이 아니라, 각자의 의견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전부 끌어안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게 협력이군요!” “매번 ‘생각’이 일치되는 것을 강요받는 게 싫었는데, 이렇게 ‘마음’이 일치되면 자연스럽게 현명한 결론이 나는 거군요!”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이번 겨울에 있을 우리 조직의 단합대회를 어디서 치를지 장소를 정하려 할 때, 제안을 몇 개 받아 투표해서 다수표를 얻은 곳으로 결정한다. 가장 많이 생각이 일치된 사람들의 선호에 따르는 방식이다. (흔히 선택하는 다수결의 방식) 이것과 다른 방식은, 구체적 장소를 떠올리기에 앞서 ‘이번 겨울’ ‘우리 조직’에 관한, 그리고 ‘단합대회’를 향한 각자들의 마음을 모으는 프로세스를 먼저 밟는 것이다. 이번 겨울은 자신에게 있어 또는 우리 조직에게 있어서 어떠한 의미로 다가오는지, 요즘 우리 조직에 관해 느끼고 있는 것이나 감사하고 있는 것에는 무엇이 있는지, 단합대회 관련하여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 혹은 동료들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 등의 물음에 관한 모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논의를 시작해 나간다.



🫴일치는 ‘하나의 점’이 아닌 ‘공간’을 향유하는 일


해당 의제에 관해 각자가 품고 있는 생각이나 스토리들 안에는 우리가 알아야 하는, 느껴야 하는, 기억할 필요가 있는 수많은 정보가 담겨 온다. 각 개인들은 그렇게 자신이 서 있는 지점으로부터 곳곳으로 여러 선들을 내고, 다른 지점들로부터 출발하는 또 다른 선들과 교차하거나 나란히 옆을 이으면서 다양한 면을 만든다. 이야기들은 금세 입체적 공간을 형성하고 우리의 마음들은 그 공간을 향유한다. 마치 “서로 다른 사람에게서 채취한 두 개의 살아 있는 심장세포를 배양접시에 놓으면, 얼마 후 이 세포들은 지속적으로 제3의 박동 소리를 똑같이 만들어낸다.”라며 몰리 바스(Molly Vas)가 언급한 ‘제3의 박동 소리’를 만들 듯 말이다. 

모두에게서 똑같은 기대와 비슷한 생각이 나오는 것이 일치가 아니다. 논의 주제가 우리에게 펼칠 수 있는 전체를 보는 거다. 이번 단합대회는 설레기도 하지만 조금 귀찮거나 염려되는 가족이 생각나거나 그래도 동료들과 속 이야기를 할 것이 기대되기도 하다는 등의, 나올 수 있을 법한 모든 이야기를 듣는 거다. 개인적 이야기와 공통된 보편의 이야기가 함께 어우러지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거다. 그러면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공간으로 다 같이 이동하게 되고, 대화는 그곳을 함께 탐구해 나가는 창조와 발견의 작업이 된다.


💪대화에서 생성되는 강력한 힘


이쯤 말씀 드리면 많은 이들이 소요 시간을 걱정하기 시작한다. 장소 논의는 언제 하냐고? 이번 단합대회에 관한 모두의 의미, 필요들을 충분히 확인했다면, 레일이 깔린 놀이기구가 가장 높은 곳을 향해 찬찬히 올라 갔다가 고점에서 아주 빠르게 내려오는 것처럼 결정은 생각보다 금방 내려진다. 앞서 들은 이야기들에 더해 몇 가지를 더 확인하여 최대한의 교차점을 찾아가는 것이다. 꼭 있었으면 바라는 것이나,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좋으면서 도움이 될 만한 요소는 무엇인지, 장소를 정하는 데 있어 고려했음 하는 점이나 염려되는 점 등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에 알맞아 보이는 구체적 장소들이 몇 군데 떠오르고 우리에게 공통적으로 중요한 것들을 전부 충족해줄 곳이 점점 드러난다. 마지막으로는 아직 반영되지 못한 필요가 있는지를 확인하여, 드러난 장소에 어떤 방식으로든 그 중요성과 의미를 담아 결정하도록 한다.

처음엔 아주 옅고 가는 선으로 그려진 밑그림에 불과했던 해당 주제가 점점 선은 짙어지고 색채가 더해지면서, 애초에 품고 있었던 ‘우리가 바랬을 법한, 마치 기다렸던 듯 딱 알맞은’ 그런 그림을 우리에게 선사해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마음이 후련해지며 머릿속이 맑아진다. 

대화를 통한 이해와 발견으로 함께 공통된 의미의 영역을 만났다면, 구성원들은 강력한 파워를 뿜는 하나의 뭉치가 된다. 같이 형성한 힘으로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발생하는데, 이는 대화 과정에서 생성된 각자의 자발성에서 나오며, 그렇게 내려진 최종 결정은 누군가의 것이 아닌 ‘나의 것’으로써 모두에게 자리매김 된다.



🗣️참여하는 대화


모두에게 좋고 옳은 것을 탐구해 가는 대화란 어떤 것일까? 영어로 다이얼로그(dialogue)는 ‘의미의 흐름’이라는 그리스어 어원을 갖고 있는 대화를 뜻하는 단어이다. ‘dia’는 ‘통과하는(through)’이란 의미이고 ‘logue’는 ‘단어’ ‘의미’라는 뜻이라서,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말을 전하는 의견 교환을 넘어서 공동으로 대화에 참여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더불어’의 개념이 담겨 있다. 

이러한 대화의 의미와 그 중요성을 강조했던, 20세기 아인슈타인만큼 큰 영향력을 끼친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1917~1992)’을 소개하고 싶다. 그는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목표를 갖고 물리학만큼 인간 의식의 본질에 관해서도 깊이 탐구한 바 있다. 특히 양자물리학자였던 그는 의식에도 ‘관찰자가 관찰하면 그것이 변하는’ 본질이 똑같이 담겨 있음을 언급하면서, 구성원들 각각이 자신이 사고하는 방식과 옳다고 주장하는 자기 견해를 스스로가 인식하고 지켜보면서 그렇게 전체가 모든 의견들을 유보한 채 함께 관찰해 나가는 대화를 두고 ‘변화에 참여하는 행위’라고 일컬었다. 이 행위를 통해 해당 주제에 관한 드러나지 않던 숨겨진 질서(또는 전체성)에 비로소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미소 냉전시대와 매카시즘 광풍의 시대를 온몸으로 겪었던 그가 지닌 염려는, 어느 특정 이념이나 사고만을 가리켜 오로지 그것만이 옳은 전체라 보는, 분리된 사고와 분열된 인류였다. 따라서 확정과 판단을 내려놓고 함께 대화해 나간다면, 현재 드러나는 파편화된 사고들은 아직 보지 못하는 숨겨진 전체를 보기 위한 그 과정의 일부라는 점을 인식하게 될 것이라 말하였다. 대화를 통한다면 그 어떤 개별성도 전부 아우러지는, 하나로 꿰이게 되는 일관성(전체성)에 도달한다고 한 것인데, 모든 관점이 이해가 되면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보다 창의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대화에 관한 데이비드 봄의 저술은 《대화란 무엇인가》(에이지21, 2021)로 번역 출간돼 있다.)


🙆대화는 사회 변혁을 일으키는 적극적인 행동


그에게 대화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혁명만큼의 아주 파워풀한 행동이었다. ‘이것 아닌 다른 것들은 틀렸다, 이것만이 옳다’는 논리와 무력으로 사람들을 선동하고 분열시키는 방식으로 당시 사회를 주도하던 강자들에게 있어 전체성을 (진리를) 향한 시민들의 깊은 대화는 지켜봐주기 어려운, 위험을 초래하는 행위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미국에선 실제로 흑인과 백인들이 모여 함께 대화하고 배우는 행위를 불법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앞에서 떠올려본 ‘단합대회 장소 결정’에 관해서도 각자의 의미들을 확인해보는 대화의 과정을 거치자는 제안이 나온다면, 일단 모든 이들의 생각을 들어본다는 것 때문에라도 이를 겁내거나 불편해 하는 부류가 있을지 모른다. 끌고 가고자 하는 결론이나 기대하는 방향으로부터 많이 빗겨나 엉뚱한 방향으로 논의가 흘러갈까 봐 두려움이 앞설 수도 있다.

좀 더 마음이 일치되는 논의 과정을 갖고 싶다면, 대화를 통해 공동의 지혜가 나타날 것이란 점을 신뢰하고 한번 그 길에 들어서보길 추천한다. 가을운동회를 앞두고 첫 기획회의를 진행할 때였다. 회의 시작 전부터 전반적으로 비협조적인 분위기가 강해 보이는 탓에 주최자들이 크게 염려하는 상황이었는데, 전체의 자기표현들을 들으며 다양한 의미들을 쌓아가다 보니 비협조적인 분위기는 애초에 목소리가 큰 한두 명이 형성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내 몇 가지 질문에 대한 나눔으로 공통된 의미의 영역을 만들어 나가니 자신들에게 딱 알맞다고 느낄 만큼의 기대감과 의욕을 같이 창조했고, 대화 과정에서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행동하면 자신에게도 좋고 전체에게도 기여가 될지를 자연스럽게 각자가 떠올리게 되는 경험도 할 수 있었다. 


🙏전체에게 이로운 결정을 위해 최소한 이것만은


일부의 견해만 드러났는데도 그것만이 전부라 확정 지으며 동의되지 않은 다수를 억지로 끌고 가려면, 비협조와 이탈을 막는 데에만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의사 확인 절차를 생략한 까닭에 그 아무도 원치 않았던 방향인데도 모두가 그 길을 가게 된다면, 그때 발생하는 시간과 에너지의 낭비도 클 것이다.

조직역동 분야에서 등장한 용어 ‘애빌린(Abilene) 패러독스’를 소개하고자 한다. 꽤 처절한 해프닝을 가리키는 말인데, 남의 일 같지 않다. 이 이야기는 ‘우리 애빌린 시에 있는 00 음식점에 가서 저녁이나 먹을까?’라고 그냥 아무렇게나 제안한 장인어른의 한마디에서 시작된다. 한여름 무더위에 에어컨이 망가진 차로 왕복 4시간을 달려야 하는 상황인데, 장모님이 먼저 ‘그래요’ 했고 다른 식구들은 싫은데도 ‘네, 괜찮아요’ 하고 답함으로써 같이 대참사를 만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음식도 정말 맛이 없었다. 집에 돌아오니 식구들 모두 불만을 터뜨린다. 사실은 다들 정말 가기 싫었고, 제안을 던진 장인어른조차 그냥 해본 소리지 자신도 가기 싫었다고 고백한다.

최소한 이런 역설적인 상황은 피해야 하지 않을까? 공통의 의미를 형성해줄 다양한 질문들을 전부 하진 않더라도, 적어도 한 사람이 한 번씩은 논의 관련해 뭐라도 말할 수 있는 기회는 갖고 넘어감으로써 대참사는 피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인간의 시야는 한정돼 있어서, 자신이 떠올린 완벽해 보이는 아이디어나 견해가 자신에게는 최선일지 몰라도 전체에 있어서는 일부의 진실일 수밖에 없다. 주위를 둘러보면 각자의 살아 있는 진실들은 다채로운 모습으로 전체를 향해 드러날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다. 부분이 아닌 전체를 만났을 때의 기쁨, 자신만 생각하는 소자아를 넘어 대자아를 경험하는 뿌듯한 기분, 마음이 안심이 되고 다 이룬 것만 같은 충만함과 주변과의 강렬한 연결감 같은 것들을 참여하는 대화를 통해 반복해 쌓아가는 이들이 늘어나길 기대해본다. 그러면 우리 사회가 좀 더 전체에게 이로울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여질 수 있지 않을까. (끝)


* 이 글은 서울시공익활동지원센터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