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주/판칼럼] 대화와 소통 #4. 더 나은 민주 사회를 위한 대화
서울시공익활동지원센터 2023.11.28조회 499스크랩 0
대화와 소통
#4. 더 나은 민주 사회를 위한 대화
서울시공익활동지원센터, 2023.11.28.
이은주 | 와이즈서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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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와이즈서클 대표는 '대화와 소통'을 주제로 4편의 '판 칼럼'을 연재합니다. 네 번째 글에서는 민주 사회를 위한 대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4. 더 나은 민주 사회를 위한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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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어릴 때, 국회의원같이 엄청나게 높으신 분들이 중대한 나랏일을 결정하면서 상식 이하로 말다툼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보면, 뭔지 모를 분함에 그렇게 눈물이 났다. 우리는 학교에서 상대를 존중하면서 이성적으로 토론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데, 국회에서마저 이러면 대체 보고 배울 수 있는 모범적인 토론장은 어디에 있는 건지 무척 답답해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국회의원들이 회의장에서는 고성에 삿대질로 싸우는데 그곳을 나서면 서로 웃으며 인사도 잘하고 사이좋게 지낸다는 이야기였다.
🤔인간은 어떤 환경에 놓이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사회적 컨테이너’라는 용어가 있다. 사람들이 서로 관계 맺고 소통하는 사회적 공간 안에 나름의 문화가 형성돼 있어서 유사한 태도 내지는 상호작용에 어떠한 룰이 있는 것이다. 인간들은 부족사회를 경험해 오면서 유전적으로 무리에서 소외되거나 퇴출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속한 곳에 빠르게 적응한다고 한다. 부족에게 피해를 준다거나 욕을 먹게 되는 행동을 하진 않는지 주변의 눈치를 보며 해당 환경에 자신을 맞추어 간다고 말이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인간은 어떤 공간에 놓이는지에 따라 말과 행동, 습성이 그곳에 따라 정해진다고도 볼 수 있겠다. 한 사람에게도 가족들과 있을 때의 모습과 일터에서의 모습, 친구들 사이에서의 자기 모습이 전부 다르게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실험이 가능하지 않을까? 서로를 대하는 것에 관한 룰을 함께 정함으로써, 속한 곳을 최대한 본인들이 바라는 모습의 공간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물론 국회처럼 오래된 공간일수록 어려운 일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새로운 컨테이너에서 사회적 이슈 다루기
이러한 면에서, 같은 일을 다른 문화를 지닌 공간에서 펼치는 시도는 주목해볼 만한 것 같다. 그러한 실험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어떠한 점은 적용해 볼 수 있겠는지 살필 기회를 얻기 때문이다.
행정안전부에서는 2020년부터 3년간, 매년 ‘지방자치단체 숙의 기반 주민 참여 및 협력 분쟁 해결 우수 사례’를 선정해 왔다. 그간 사실 많은 지자체에서 주민총회나 시민 공론장 등 숙의 및 직접민주주의의 방향성을 지닌 프로그램들을 진행해 왔는데, 행안부에서 발간한 우수 사례집을 통해 그 과정을 디테일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그중 2021년 전주시에서 진행한 ‘옛 대한방직 부지 관련 시민 공론화’ 사업만 잠깐 들여다보도록 하자.
2020년 2월부터 1년에 걸쳐 시민들이 바라는 옛 대한방직 부지의 모습과 고려해야 할 점을 전부 듣겠다는 취지로, 시나리오 워크숍과 공론조사를 거쳐 전주시에 최종 권고문을 제출하는 순서로 공론화는 진행되었다. 내가 관심 있는 과정은 워크숍에서 시민들이 서로 어떠한 방식으로 대화했는지 이다. 32명이 4그룹으로 나뉘어 테이블을 네모로 놓고 앉아, 부지에 대한 미래상을 논의하였다. 매주 토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총 3회에 걸쳐 만났고, 보통은 전지에 조별 토의 내용을 크게 적어 전체 앞에서 발표하는 형식이었다. 전체 행사 진행자가 한 명 있고, ‘모더레이터’라는 이름으로 조별 토론 퍼실리테이터가 있다. 토의 규칙은 아래와 같았다.
사진: 전주시청 홈페이지에 올라온 자료집 중에서
그룹으로 모여 먼저 자기소개와 참여 소감을 돌아가며 말하고, 위의 규칙에 따라 서로들 의견을 나누었다. 포스트잇을 사용하여 비슷한 내용은 서로 합치고 개별 질문 사항이 생기면 또 적어서 전지에 붙이고, 스티커를 사용해 선호하는 항목에 투표하며 의견들을 모아 갔다. 그래도 규칙이 사전에 공유되고, 모더레이터라는 존재가 그룹마다 진행으로 기여해 준 덕에 비교적 수월하게 이야기 나눈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논의 시간이 길지 않고, 딱딱한 콘크리트 건물에서 대화가 진행되었다는 점이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이성과 지성, 감성이 함께 발휘되기 위한 대화의 장
시나리오 워크숍의 대표 사례로 꼽히는 것은 아마도 1991-1992년 진행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몽플레 프로젝트’일 것이다. 당시 남아공은 인종분리정책이 철폐되면서 혼돈의 시기를 맞은 상태였는데, 한 사회의 깊은 갈등을 무력 분쟁이 아닌 대화로 풀어낸 감동적인 역사로 이 프로젝트가 꾸준히 회자되어 온다. 당시 남아공 사회에 영향력 있는 인사 22명은 몽플레(mont fleur) 컨퍼런스 센터에 모여 10년 후 남아공 미래에 가능할 만한 시나리오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들은 서로 적대했던 흑인과 백인 쪽을 각각 대표하는 정치가이자 집권당 사람들이기도 했으며 공무원, 노조, 기업 고위 임원, 학자 등으로 구성되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워크숍 공간과 진행 일정이었다. 이름에 프랑스어 ‘몽’이 들어가 있다는 것만으로 산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첫 워크숍은 완연한 가을 날씨를 보이는 9월이었다. 포도나무밭이 있는 산을 둘러싼 센터에서 펼쳐진 워크숍 안에는 장난과 농담이 평화로운 대화를 거들었고, 쉬는 시간에는 산책하러 나가거나 공을 이용한 간단한 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저녁에는 와인이 끊이지 않았으며 중요한 스포츠 경기가 열리면 대화를 잠시 멈추고 모두 모여 함께 관람하였다고도 한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서로를 알아가게 된 것인데, 자신들의 조부모에게서 들은 이전의 아픈 역사, 각자에게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사회적 경험, 자기 신념을 지킬 수 없었던 아픈 기억,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일 등을 허심탄회하게 서로가 나눈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 나눔은 미래를 위해 서로가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고, 중요시해야 할 것들에는 더욱 같이 힘써야겠다는 의지가 형성되도록 도왔다. 이를 보면, 어려운 대화일수록 여유로운 공간과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진: 몽플레 컨퍼런스센터 홈페이지 메인화면
또한, 이곳에서 사용된 대화 원칙도 눈여겨볼 만하다. 절대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의 정책이나 스스로가 원하는 미래를 주장하지 말고, 현실적으로 정말 앞으로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을 말하도록 했다. 특히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날 거라고 생각해?’,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돼!’ 등의 비난이나 비꼬기, 무시, 질책이나 충고 같은 반응은 불가하고 단지 ‘왜 그런 일이 일어나나요?’ ‘그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나요?’처럼 상대의 이야기를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해 던지는 질문만 할 수 있었다고 한다(애덤 카헤인의 《통합의 리더십》(에이지21, 2008)에서 더 자세히 볼 수 있다).
🙋독보적으로 뛰어난 1인보다 보통의 다수가 더 나을까?
그렇다면 더욱 민주적인 결정을 위해 매번 이렇게 큰 비용을 치러가며 사회적 대화의 장을 열어야 할까? 현명한 누군가가 해결책을 내거나, 직접들 모이지 않고 각자 서면으로 제출하면 정리만 하는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 좀 더 현실적이고 효율적이지 않은가 하는 물음이 들 수도 있다.
일단 사람들은 모였을 때 더 지혜로워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음을 소개하고자 한다. 집단지성에 관해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한 명의 전문가보다는 여러 사람들에게서 모인 지성이 훨씬 뛰어나다고 이야기한다. 1907년 프랜시스 골턴(Francis Galton)은 이와 관련한 거의 최초의 연구를 진행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무척 상징적인 연구로 거론되기도 한다. 황소 한 마리 앞에 서 있는 사람 800명에게 이 소의 무게를 추측하여 적어내라 했고, 이들의 평균값을 계산하였을 때 놀랍게도 실제 측량한 무게와 1파운드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추측 값의 평균치는 1,197파운드였고, 실제 소의 무게는 1,198파운드였다!) 이후로 문제나 미션을 그룹과 개인에게 주고 풀어내게 하는 수많은 연구가 진행되었고 이것들이 점점 축적돼 나가면서, 집단이 한 개인보다 더 똑똑하기 위해 필요한 몇 가지 조건이 추려졌다. 집단지성에는 다양성이 핵심인데, 이것이 발휘되기 위해서 집단 내 구성원들은 스스로 그리고 독립적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어떤 압력의 영향을 받아서는 아니 되며 각자가 답을 낼 때는 최대한 진실해야 한다.
함께 모였을 때 스스로가 독립적으로 생각할 수 있으려면 물론 자신을 표현하고 상대를 깊이 경청하는 데 있어서 안전한 대화의 공간을 형성하는 게 먼저이겠으나, 서로가 지닌 다른 목소리들을 적극 환대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몹시 필요하겠다. 동의의 목소리와 반대의 목소리, 관조하는 입장 각각이 담고 있는 그만의 의미나 중요성이라든지 염려나 고려해야 할 점, 그럴 수밖에 없는 필요 등에 관하여 빠짐없는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강압으로 인하여 어떤 특정 목소리에 손을 드는 것이 아니라, 각자들의 위치에서 지니고 있는 다양한 시각들을 접하면서 자신의 진실된 의견을 더욱 분별하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그건 당신 생각이고, 저는 아니에요. 우린 달라요’로 쉽게 대화를 끝마치려 하지 않아야 한다. 어떤 지점에서 다른 것인지, 상대의 생각이 충분히 이해될 수 있을 때까지 질문하고 듣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어렵게 모여진 공동의 지혜는 모두에게 선일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대화의 참맛을 아는 이들이 늘도록 하기
집단지성은 구성원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는 문제일수록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물론 모든 문제가 대화로만 풀리진 않겠지만, 이해관계가 복잡하고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을수록 사람들이 직접 모여 대화하는 것이 실제 해결에 크게 유익하다고 한다. 한 자리에 모인 이들이 오감을 넘어 육감을 사용하면서 서로의 진정성을 몸으로 느끼고, 함께 호흡해 가는 역동 안에서 해당 문제에 온전히 마음을 다해주는 것이다.
집단지성을 향한 깊은 대화의 경험 또는 훈련된 이들의 수가 늘어 곳곳에 퍼져 있다면 좋겠다. 사회적 문제뿐 아니라 우리는 가정이든 일터든 속한 모든 곳에서 함께 풀어내고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매번 부닥치기 마련인데, 대화하고 상호 작용하기에 유용한 컨테이터를 곳곳에 만들어 가는 것이다. 대화의 참맛을 아는 사람들이 약간씩만 기여하여 매번 모두를 위한 지혜로운 결정과 선택을 함께 해 나갈 수 있길 기대해 본다.
👥👥사회 변화를 일으키는 대화 그룹 만들기
나는 창발성에 관심을 두는 통계물리학이 참 좋다. 상태의 변화를 위한 개인들의 움직임을 연구해 줌으로써, 사회 변화를 위한 기획에 많은 보탬이 되어준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중 두 가지만 꼽자면, 사회 변화가 일어나는 문턱값으로 도출된 3.5퍼센트라는 숫자와 13.4퍼센트라는 숫자를 소개하고 싶다. 전 세계적으로 1900년부터 2006년 사이에 일어난 시민들의 저항 운동을 살폈을 때, 3.5퍼센트 이상의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참여한 운동은 항상 성공했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신념을 지닌 이들이 전체의 13.4퍼센트만 넘으면 다른 이들도 쉽게 이쪽으로 넘어올 수 있다고도 말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여건은, 꾸준히 해야 한다는 점이다. 정기적으로 꾸준히 모여 지속적으로 대화하며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고 함께 사고를 키워나간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같이 행동한다. 사회 구성원 전체를 아우르지 못하는 편향적 모습이 아닌, 모든 이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필요한 신념과 행동에 방향성을 두고 함께하는 것이다.
주변에 공익과는 반대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이들에 너무 신경이 쓰여 좌절되고 지친다면, 이러한 사람들이 전체의 86.6퍼센트까지는 돼도 괜찮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다시 힘내서 일어나자고 제안하고 싶다. 그리하여 매일 아침 해가 밝으면, 아직 만나지 못한 13.4퍼센트를 발견하러 갈 생각에 가슴이 뛰길 바란다. 그들과 만나 지속적으로 대화하며, 그렇게 민주적 시민을 늘려 가보는 것이다. 더 나은 민주 사회로 만들기 위해 중요한 사회적 의사결정들이 더욱 민주적이도록 하는 많은 시도와 노력이 필요하겠으나, ‘시민 몇 명씩이 곳곳에서 모여 꾸준히 대화하는 것’ 이것이 가장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강력한 힘을 갖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한다. 같이해 보자.
- 끝 -
* 이 글은 서울시공익활동지원센터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