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리/판 칼럼] 나의 세상을 만들고 성장하기(1)
서울시공익활동지원센터 2024.10.31조회 71스크랩 0
나의 세상을 만들고 성장하기(1)
서울시공익활동지원센터 | 2024.11.01.
전주리 | (사)공동육아와공동체교육 사무총장
전주리 (사)공동육아와공동체교육 사무총장은 공동체 일원으로 성장하는 법을 주제로 2편의 판 칼럼을 연재합니다.
나의 세상을 만들고 성장하기(1)
나의 세상을 만들고 성장하기(2)
사람과 사람이 함께 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다. 물리적인 공간인 옆자리부터 마음속 자리까지를 내어주는 일이다.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고 관계하는 규칙이 다른데, 이로 인한 불편함을 감수하고 다름을 받아들일 용기를 내는 일이다. 그렇게 받아들인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나라는 존재를 입체적으로 보게 하는 면이 있다. 그리고 사람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게 해주기도 한다. 타인이 반영해 주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을 제대로 알기 어렵다.
현대 사회는 마을과 고향이 품고 있던 공동체문화가 사라지고 개인화가 심하게 진행되면서 ‘나 홀로 각자도생’의 사회가 되었다. 더구나 내 손 안의 가상 세계에도 익숙해지게 되어, 현실 속 관계는 점점 더 귀찮고 부담스러워지고 어려워지고 있다. 그래서 노리나 허츠는 ‘고립의 시대’라는 책에서 외로움의 문제가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고 말한다. 영국에는 외로움을 담당하는 정부 부처가 있다고 해서 신기해했는데 이제 우리나라에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며칠 전 2024년 10월 21에 서울시의 외로움 대책이 발표된 것을 보면 말이다.
현대인들은 유대가 필요하고 연결이 그립다. 그런데 관계의 힘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우리는 이제 서로가 너무 낯설다. 관계는 인간에게 본능인데 이를 거부하는 사람이 생겨나고 늘어나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23년 공개한 '고립·은둔 청년 현황과 지원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사회 활동이 줄어들어 취약 상태에 처한 고립 청년(19∼34세)은 2021년 기준 전체 청년의 5%(54만 명)이다. 코로나19 이후 전체 고립 청년 수도 2019년 34만 명(3.1%)에서 2021년 54만 명(5%)으로 늘어났다(연합뉴스 황수빈 2024016).
그들에게 일어나는 은둔과 고립이 그들만의 문제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탄광 속의 카나리아처럼 우리 모두의 어려움을 표시해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 사회에 사는 우리는 관계하기 위해 서로에게 자리 내어주는 마음을 먹어야 한다.
그리고 고립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공동체이다. 공동체는 현대인에게 고립을 해결할 개인의 소속이자 관계망의 의미를 지닌다.
관계망이 되어줄 나의 소속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도 실상 첫 시작은 사람과 함께 하는 것, 옆 사람에게 자리 내어주는 일이다.
그런데 보통 공동체를 말할 때 사람들은 과한 기대를 하거나 혹은 부담을 갖는다. 공동체란 끈끈하게 함께 한다는 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도 공동체라 할 수 있고 동아리도 느슨한 공동체라 말할 수 있다. 마을이나 고향도 공동체의 역할을 했었다. 내가 속한 조직들이 각각 공동체의 다양한 모습일 수 있다. 이 소속들이 사라진 것이 문제를 낳는다.
소속이란 나의 사회이다. 최소한 소속이 있다면 홀로 고립될 가능성은 줄어든다. 소속이 있다는 의미는 일상적으로 만나는 집단이 있다는 것이고 자신을 반영해 줄 수 있다는 것, 나와 다른 사람들의 관계를 울타리 지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독일 막스 플랑크 사회인류학 연구소의 샹뱌오 소장은 ‘주변의 상실’이라는 책에서 “한 개인은 스스로 사람의 존엄성을 추구할 수 없다. 대신 부근을 세우고 이 관계를 재고하며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구축되는 관계를 관계망이라 하면 관계망이 되어줄 나의 소속을 공동체라 말할 수 있다. 그 중 지속적이지 않거나 실제 활동이 없는 온라인 중심의 취향 공동체나 사이비종교 등에서 말하는 해로운 공동체 말고 건강한 공동체를 찾고 함께 하는 법에 대해 알아보자.
건강한 공동체
건강한 공동체의 요건이라면 사회에 이로운 가치를 지향하는 것과 구성원들이 합의하여 만들어가는 것을 들 수 있다. 사회에 이로운 가치의 기준은 각자의 가치관이 다르니 여기서는 논외로 하자. 그렇다면 공동체의 건강함은 함께 만들어가는 유연함의 정도에 있다. 소통에 있어 수평적인 문화가 있어야 그 공동체에서 나를 실현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체라 해서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수직적인 의사 구조는 한 사람에게 맞추면 되지만 수평적 공동체는 모든 구성원과 맞추어 가야 한다.
공동육아를 확장하기 위해 어린이집을 방문해 워크숍을 하는 교사들에게 갔을 때였다. 교사들에게 교사 회의에서 스스로 결정하게 했을 때 오히려 이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도 있었다. ‘원장님이 혼자 결정하면 결정에 불만이 있어도 원장님 탓하면 되니 우리끼리는 사이가 좋은데, 우리가 결정하라고 하니 모두 사이가 나빠진다’고 했다.
건강한 공동체에서 함께 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는 말이다. 당연히 수평적 공동체에는 함께 만들어가는 구성원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구성원들은 일에 대해 고민하고 관계에 대해 고민하며 고군분투하게 된다.
일이란 무엇인가? 세상에 대한 기여
급여를 받든 활동비를 받든 관계없이 모든 활동은 일이다. 일이란 나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수동적인 상태에서 일이란, 나를 직장이나 세상에 맞추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밥벌이라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하지만, 태초에 일의 시작은 그렇지 않았다. ‘일을 통해 세상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기여’의 의미가 있었다. ‘내가 공동체의 활동을 통해서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무엇을 기여하고 싶은가?’를 정리한다면 내가 이곳에 온 이유와 이곳을 사랑하는 이유도 알게 된다. 이에 대해 생각해 나의 일에 대한 해석과 의미 부여가 된다면 적응하는 삶에서 만들어가는 삶이 될 수 있다. 세상에 기여하는 일을 하면서 나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공동체를 선택하다
모든 공동체에는 그 공동체가 지향하는 철학, 가치관이 있다. 명시적으로 있는 경우도 있지만 암묵적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공동체에 속한 구성원들은 공동체의 가치관에 동의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나는 왜 이곳에 있는가?’를 정리하는 것이 공동체 생활에 도움이 된다. 이 공동체의 어떤 면에 동의하고 좋아하는가? 이것을 ‘다시 선택하는 태도’라고 말하자. 다시 선택하면 주체성이 생긴다.
결국은 삶의 모든 것이 조절이기 때문이다. 나와 타인의 조절, 나와 조직의 조절이다. 돌아보면 타인에게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100% 만족할 수는 없다. 자신에게 100% 만족한다면 오히려 그것은 과한 나르시시즘의 표현일 것이다. 공동체와의 관계도 그렇다. 100% 만족하는 공동체는 없다.
공동체 적응에도 암묵적인 단계가 있다. 처음에는 서로에게 기대하며 환상을 갖는 시간이 있어 모든 것이 새롭고 좋아 보인다. 하지만 조금 익숙해지면 공동체의 많은 것들이 온통 문제로 보이는 문제 제기의 시간이 온다. 이 시기를 잘 지나야 장단점을 통합해 볼 수 있는 진정한 구성원이 되어가는 시간이 온다. 이것이 대부분 겪는 조직의 역동이고 관계의 역동이다. 친구들도 연인들도 이 역동을 거친다. 공동체 구성원들도 그렇다. 그래서 공동체에 대해 생각하고 다시 선택해야 한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만들어가는 공동체를 위해서 말이다.
즐겁게 일하기
흔히 공동체에서의 일을, 마음을 내어 하는 일이라고 한다. 마음을 내어 하는 일에는 자원 활동의 성격인 일들이 따라온다. 퇴근하고도 계속 생각이 나서 무언가를 하게 되고 술자리에서도 이야기를 지속하게 된다. 어느새 과외 업무를 감당하게 되고 그러면서 지치기도 한다. ‘왜 이러지 이래도 괜찮은가?’ 고민되는 날이 온다.
공동체에서의 일은 가치를 포함한 일이라 단순한 일은 아니지만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일이기 때문에 온 힘과 정성을 다해도 즐겁다. 일종의 내 세상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흥을 잃지 않고 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야 그 공동체에서 내 모습이 빛이 나고 내가 좋아하는 공동체의 가치가 빛이 난다.
함께 일하는 동료 구성원 중 어떤 사람이 제일 평가가 좋을까? 즐겁게 일하는 사람이다. 시무룩하고 반응이 없는 사람은 생산성을 떨어뜨리지만 즐겁게 일하는 사람은 함께 일하는 나의 흥을 높이고 조직의 생산성을 높이기 때문이다. 본인이 동의하고 좋아하는 일인데 이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인증하듯이 하고 있다면, 혹시 내가 지친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지친 것이라면 조절이 필요하다. 일과 휴식의 조절, 마음의 거리의 조절. 그리고 그 가운데에 새로운 바람을 넣어줄 필요가 있는 때이다.
고비마다 성장의 열쇠가 있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끊임없이 의미를 고민한다. 의미를 고민하면서 열과 성을 다하다가 나의 한계를 깨닫는 때가 온다. 모든 사람은 한계가 있고 그 한계도 매번 똑같지는 않다. 수평적인 범위의 한계가 있고 수직적인 범위가 있을 것이다. 현재 00세 나이인 나의 상황에서 오는 한계와 현재 구성원과의 합, 나의 물리적 상황에서 오는 한계가 있다. 한계가 오면 고민이 많아진다. 고민하는 과정에서 성찰이 일어난다. 성찰의 결과로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포기할 것과 용기 내어 만들어갈 것을 알아간다. 타인의 것과 내 것, 조직의 것과 사회에 요구할 것의 적정선을 알아가고 그것들을 조절하는 법을 알게 된다. 그 과정을 힘겹게 넘어서다 문득 돌아보면 이만큼 성장한 나를 발견하게 된다. ‘철부지사회’라는 책에서는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포기가 없으면 성숙도 없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뭐든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성찰은 나의 한계를 깨닫는 것에서 시작하고 주위 지원군을 깨닫는 것으로 승화되어 성장으로 나아간다. 끊임없이 자기 이해와 자기 객관화를 해가는 과정이다.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통합해 가는 과정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서울시공익활동지원센터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