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리/판 칼럼] 나의 세상을 만들고 성장하기(2)

서울시공익활동지원센터 2024.11.01조회 49스크랩 0

나의 세상을 만들고 성장하기(2) 

서울시공익활동지원센터 | 2024.11.01.

전주리 | (사)공동육아와공동체교육 사무총장



전주리 (사)공동육아와공동체교육 사무총장은 공동체 일원으로 성장하는 법을 주제로 2편의 판 칼럼을 연재합니다. 
나의 세상을 만들고 성장하기(1)
나의 세상을 만들고 성장하기(2)


나의 뒷모습을 건드려주는 관계를 통한 자기 이해 

나는 모르는데 남들은 아는 나의 모습이 있다. 나의 뒷모습이다. 이 뒷모습을 그림자라고도 한다. 나의 뒷모습은 내가 못 보는 모습이기도 하지만, 숨기고 싶은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뒷모습을 일부러 보게 하면 놀라고 당황한다. 그러다가 잘못하면 관계를 해친다. 

이 뒷모습을 자연스럽게 보게 하는 것이 믿을 수 있는 사람과의 관계이고 또 일이다. 개인끼리 관계할 때와 일할 때 드러나는 모습은 다르다. 공동체 안에서의 모습과 밖에서의 모습이 다를 수 있다. 구성원들은 서로의 관계와 일을 통해 이 다른 모습을 서로서로 반영해 준다. 그래서 관계와 소속이 있다면 나는 나의 다양한 면을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것을 자연스럽게 해주었던 것들이 마을과 고향 같은 소속이었다. 어릴 때는 친구들과의 놀이를 통해 나의 신체를 이해하고 마음을 이해하고 성장한다. 어른이 되어서는 친구들과의 관계나 소속된 곳에서 역할을 통해 나의 뒷모습을 끊임없이 발견해 통합해 내고 성장한다. 함께 생활하더라도 나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관심이 없는 조직에서는 성찰이 일어나기보다 좌절이 일어난다. 그리고 가치관이 다르거나 지향이 다른 곳에서는 충돌이 일어난다. 긍정적으로 나를 반영하고 우려해 주고 함께 해주는 곳에서 겪는 힘겨움과 희로애락이 나를 성찰하게 하고 성장하게 한다. 자기 이해와 자기 객관화는 자신의 뒷모습을 알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생겨난다.


체험이 아닌 경험으로서의 관계 안심망 

현대인은 온라인과 전 세계를 배경으로 한 넓은 관계 속에서 살지만 반면 본인의 속마음을 표현할 만한 관계는 정작 없다. 본인의 어려움과 고충을 자연스럽게 토로하려면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신뢰를 쌓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 속에서 다양한 경험을 나누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경험을 나눈다는 것은 긍정적인 일 부정적인 일 쉬운 일 어려운 일 모두를 나눈다는 것이다. 아마 주소록에 저장된 많은 관계 중 체험하듯 만나는 관계는 많지만, 경험을 공유하는 관계는 손에 꼽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알던 친구가 편한 이유는 나를 꾸미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 밖을 나가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감정노동을 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타인에게 굳이 내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되는 시대에 살기 때문이다. 집이 좀 어지러워도 내 상황이 아무리 우울하거나 짜증이 나는 상태여도 초대하고 만날 수 있는 관계는 희로애락을 함께 하는 세월 속에서 생겨난다. 좋은 공동체는 그 희로애락을 안전하게 겪으며 변화할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을 관계망 안심망이라고 한다. 

코로나로 서로에게 감염의 위험이 있어 서로 꺼릴 때도 만나면 위안이 되는 사람이 있는 곳. 이 연결만은 끊지 않아야겠다 싶은 사람이 있는 곳이 공동체들이었다.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재난의 시간을 조금 덜 힘겹게 넘어갔다. 그 공동체가 작은 도서관이기도 하고 동네의 돌봄 기관 시민단체 등이기도 했다. 오히려 공공기관은 철저한 방역을 위해 멈춘 때에 우리는 함께 하는 공동체에서 큰 위안을 얻었다. 함께 하는 관계망 자체가 또 다른 공공성인 사회를 확인했다.


갈등 다양성 이질성과 이해하기보다 익숙해지기

모든 관계에는 위기가 온다. 그 위기는 갈등의 모습으로 오기도 하고 지루함을 거친 실망의 모습으로 오기도 한다. 

처음 얼마 동안은 서로 조심하여 좋은 면만 보이겠지만 어차피 사람이란 서로에게 폐를 끼치기도 하고 도움도 받으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차이가 드러나고 갈등이 생기는 순간이 올 수밖에 없다. 공동체 내의 갈등으로 마음이 상한 상대가 생기게 되면 그 공동체 생활에 대한 열정과 흥미도 떨어진다. 그렇다고 지금의 갈등을 피하려 한다면 다음 순간에는 더 큰 파고로 올 수도 있다. 그 갈등의 일정 부분은 내가 만드는 관계의 역동도 있기 때문이고 모든 관계에는 희로애락이 있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는 자연재해는 다루는 것을 고민해야 하는 법이다. 갈등도 그렇다. 작은 것부터 다루는 법을 익혀야 한다. 

공동체에서 갈등이 일어나면 보통 서로의 의사와 상황을 잘 확인하는 것을 한다. 소통을 점검하는 것이다. 확인하는 과정에 의외로 내 생각과는 달랐던 사실 및 상황을 이해하게 된다. 소통에서 소외된 곳을 알게 되고 오해했던 일들을 확인하는 것으로도 모든 갈등의 절반은 해결된다. 그러려면 우선 경청해야 한다. 상대의 말에 동의하기 어렵고 반박할 말이 산더미더라도 상대의 말을 우선 들어주는 마음이 경청이다. 경청하는 자세와 마음이 관계를 회복시킨다. 

그래도 해결되지 않는 큰 갈등을 넘어가기 위해서는 나의 노력에 더해 시간도 필요하다. 이해하기보다 익숙해져야 해결되는 갈등도 있는 법이다. 서로가 갈등에 휩싸여 예민할 때는 약간의 건드려짐으로도 상처를 덧나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때는 에너지의 집중보다 느슨함이 도움이 된다.

시간이 주는 힘을 믿어야 갈등의 파고 속에서 그 시간이 잘 지나가기를 버틸 수 있다. 아무리 심각했던 갈등도 일정 시간이 지난 후에 돌아보면 ‘그때 왜 그랬지’ 싶어지는 순간이 온다. 그 시간을 갖기 위해 약간의 거리두기도 괜찮다. 다만 도망가듯 멀리 가는 것은 좋지 않다. 새로운 바람을 쐬듯 다른 곳을 여행하듯 그 정도의 거리를 두는 것이 꽁꽁 묶여있는 나의 에너지와 공동체의 에너지가 부드럽게 풀리는 데 도움이 된다. 유예할 것은 유예하고 익숙해질 것은 익숙해져야 그 파고가 끝이 난다. 불이 났을 때는 불이 난 원인이나 범인을 찾기보다 제일 먼저 불을 꺼야 한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갈등에 휩싸였을 때도 원인을 찾고 원흉을 찾느라 공동체 전체가 위기로 덮여가고 있는데 간과하고 못 보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또 하나 유의할 점은 우리가 받는 모든 상처에 과거가 있다는 것이다.

배르밸 바르데츠키는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는 책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지금 앓고 있는 상처는 대개 이전의 상처받은 경험, 자존감을 건드린 경험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이런 기억들은 미해결 과제가 되어, 해결이 되지 않은 채 무의식 속에 남아 있습니다. 무의식 안에서 미처 해결되지 않은 옛날의 상처가 되살아나면서 마음 상함을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건드려진 나의 상처에서 이전의 상처와 이번 상처를 분리하여 이해하기 위해서도 시간이 필요하다. 


공동체의 일원이 되려면 기대의 조절이 필요하다.

공동체에 온 사람들은 서로에게 이상적인 기대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 기대는 보통 다른 곳에서는 하지 않는데, 지향하는 가치를 중심으로 일어난다. 환경이나 교육을 위해 모였거나 취약한 사람들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이니 도덕적으로도 완벽하고 좋은 것일 것이라는 기대이다. 

그런데 가치를 지향하여 만났다고 해서 처음부터 그 가치에 걸맞은 사람은 아니다. 표방하는 가치는 근사하지만 실상 우리의 삶은 여전히 찌질하고 소심하고 약간씩 나쁘다. 가치에 걸맞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서툰 사람일 뿐이다. 이 서툰 진심을 알면 서로에게 유연해질 수 있다. 

이때 잊지 말아야 할 최소한의 신뢰가 있다. 우리는 최소한 이 공동체에 나쁜 의도로 오지는 않았음에 대한 신뢰이다. 지금의 혼란이 공동체를 위하는 마음으로 일하다가 일어난 일이라는 것에 대한 신뢰이다. 그러면 마음 터놓고 서로에게 기대하는 것과 우려되는 것을 이야기해 볼 수 있다. 강함을 드러내는 것은 신뢰와 두려움을 주지만 서로의 취약함을 드러내는 것은 오히려 보호와 애정을 불러일으키는 법이다. 무엇이 옳으냐로 다투기보다 나의 서툰 진심을 이야기하고 들어주다 보면 꽁꽁 묶여있던 마음이 풀리게 된다. 


긍정의 기운을 표현하여 서로 응원하며

우리 사회에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주로 공동체를 찾아오고 가치와 의미를 생각한다. 문제의식이 뛰어난 사람들이다. 그래서 쉽게 만족하기보다 문제를 찾아 노력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조직은 무엇이 문제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한다. 아마 소속된 조직의 역사를 돌아보면 매번 시기마다 위기라고 말하고 있을 것이다. 새로운 길을 찾아 만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어렵지 않은 적이 없고 위기가 아닌 적이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 대한 긍정적인 응원과 지지와 장점 찾기를 의도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우리가 노력한 것, 잘한 것, 애쓴 것을 매번 챙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에너지를 내주기만 하고 받지 못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 어려울 때일수록 공동체 내부 구성원 전원이 문제만 말하고 긍정적인 것은 언급하지 않는 문화가 형성되기 쉽다. 그럴 때일수록 응원하고 지지하고 칭찬해 주면서 힘을 북돋아야 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노력해 챙겨야 한다.

사람이 하는 일에서 효율을 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들의 기운을 좋게 하는 것이다. 회의를 시작할 때, 일을 시작할 때 분위기를 부드럽고 따뜻하게 하는 것부터 신경 쓰면 모두가 만족하는 결과를 만들기가 쉽다. 그렇게 쌓인 긍정적인 내부 문화가 공동체를 둘러싼 순환도 선순환으로 만들어 다른 일에도 도움을 준다.


세대 간에 서로 배우기

세대의 문제는 이미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압축성장과 빠른 선진화로 이 나라에는 너무 다양한 세대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 한국전쟁의 가난을 기억하는 세대와 K-컬쳐의 선진국으로 한국을 기억하는 세대, 디지털이 낯선 세대와 폰 안의 세계가 기본인 세대, 개고기를 먹던 세대와 개를 가족으로 대하는 세대가 함께 살고 있다. 

공동체 내에서도 세대 차이로 인한 어려움이 많다. 이럴 때 흔히 공동체에 일찍 들어온 경력자가 가르치는 자가 되고 새로 들어온 구성원이 배우는 자의 입장이 되곤 한다. 그리고 그 분위기 안에서 공동체 꼰대가 생겨난다. 공동체의 꼰대질은 보통 가치의 외피를 쓰고 온다. ‘우리 공동체는 이래. 우리 공동체와 맞지 않아’라는 말을 쓰고 온다. 

하지만 세대 차이는 한 방향으로 가르쳐서 해결할 수 없다. 서로 배워야 한다. 새로운 사람, 어린 사람은 공동체에 새로운 문화를 갖고 오는 존재이다. 그들이 문화를 전해주기보다 위축되어 있다면 그 공동체는 갈수록 생기가 떨어진다. 세대의 차이는 시대의 차이이고 시대 분위기와 동떨어진 공동체는 유지가 쉽지 않다. 새로운 사람들이 우리 공동체를 그들에 맞게 변주할 수 있도록 자리 내어주기가 필요하다. 일례로 기후 감수성, 디지털 감수성, 다양성 감수성은 나이 어린 세대가 뛰어나다. 공동체 감수성과 문화는 나이 든 세대가 잘 안다. 우리는 서로에게 배워야 한다. 서로 잘 모르고 어려우면 피하게 되고 심하면 오해가 생긴다. 마음을 열고 만나기 위한 여러 장치가 필요하다. 자연스럽게 서로가 친해지도록 형식을 가지는 것도 고민해야 한다. 일만 하는 회의가 아니라 서로 조금씩 친해질 수 있는 회의 형식을 고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공동육아의 회의 문화 만들기 과정에서 가장 반응이 좋았던 것은 ‘열기’였다. 회의에서 일만 논의하다 보면 점점 그 분위기가 윤활유 없는 기계처럼 서걱거리게 된다. 친한 사람들만 유대가 강해져서 다른 쪽에서는 오해가 생기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회의 시작 전에 ‘열기’가 필요하다. 인트로를 두는 것이다. 오늘 나의 상황이 어떤지 오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등등 자신의 일상을 잠깐 나눈 후 회의를 진행하면 그 회의에 부드러운 온기가 생겨난다.  


나의 세상 만들기

내 세상은 어디까지일까? 넓게 보면 전 세계와 우주일 수도 있고 핸드폰에 저장된 모든 연락처 속 사람들과의 공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좁게 보면 내가 속한 이 공동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곳에서 나와 공동체의 생활과 활동을 구성원들과 함께 일구고 더 큰 세상을 향해 보여주고 말하는 것, 그것이 나의 세상 만들기이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인생의 여정에서 자신의 세상을 만들고 일구고 있다. 내가 이 세계의 주인은 아니지만 내 인생에서는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랜 장인이 결국 자신의 작품에 새겨넣은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말이 있다. 앞서 말한 자신의 주변을 구축하는 것도 곧 세상 만들기이다. 공동체 생활도 곧 나의 세상 만들기이다. 그 공동체의 모습에 나의 모습을 새겨넣는 일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건강한 공동체들이 곳곳에 많이 자리해야 사회가 건강해진다. 


공동체의 생활이 앞서 말한 것처럼 좌충우돌하며 서툴고 혼란스럽고 상처도 나고 아픔이 있다고 해도, 그래도 용기 내어 가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나를 만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 길에서 우리 모두 조금 덜 상처 받으면서 즐겁게 또 소중하게 잘 일구어 나갔으면 좋겠다. 

그럼, 우리의 관계망이 되는 공동체를 위해 그리고 하루하루 치열하게 성장하는 나를 위해 오늘도 건투를 빈다~~ /끝/



* 이 글은 서울시공익활동지원센터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