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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가 손희정 교수와 함께하는 <우리가 그리는 우주>

활동기간   2022.06.02 ~ 2022.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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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기록] 헤어질 결심 & 모어, 의미망 들여다보기
  • 유보미
  • 2022.08.04
  • 조회수 105

“두 작품 때문에 신이 나 있는 상태에요. 😄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과 이일하 감독의 <모어>를 소개하는 손희정 교수님의 말과 표정에서 찐애정이 느껴졌어요. 두 영화 모두 섹스와 젠더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해요. 두 감독의 작품들 속에서 이러한 개념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보기 위해 먼저 섹스와 젠더를 페미니즘 관점에서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어요. 



 


페미니즘은 성기가 나를 규정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사람 안에 있는 굉장히 다양한 여성과 남성의 기질들을 봐야 해요. 섹스와 구분되는 젠더가 등장한 중요한 문제의식입니다. 


페미니즘을 물결로 구분하면 연속성 있는 역사를 단절적으로 이야기하게 된다는 문제의식이 있으나 대중문화와 영화 매체를 고민하는 저로서는 큰 흐름에서 명백히 나누는 지점이 있어요. 그 운동들 안에서 매체가 무슨 역할을 했는가에 주목합니다. 1물결은 인쇄물, 2물결은 TV와 라디오, 3물결은 대중문화와 인터넷, 4물결은 디지털 전환과 함께하죠. 국경을 넘나드는 교류와 교차성의 시대입니다.   


가장 오래된 페미니즘 고전은 18세기 말 영국 철학자이자 작가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쓴 <여성의 권리 옹호>인데요. 여성의 참정권, 경제권, 교육권 등을 주장한 페미니즘 제1물결의 시작을 알린 글이죠. 공적인 영역에서 남녀평등과 여성해방을 외친 것이 제1물결이에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핵심동력이었죠. 메리는 서프러제트 운동보다 한 세기 전에 <여성의 권리 옹호>를 쓰면서 근대인간으로서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게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교육이 남자와 여자의 인간됨을 결정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시몬 드 보부아르가 쓴 <제2의 성> 첫 문장이 유명하죠.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다.”(번역에 따라 버전이 다릅니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작가이자 사회운동가인 베티 프리단의 <여성성 신화>와 함께 페미니즘 제2의 물결을 일으킨 책으로 기록되어 있어요. <제2의 성>의 핵심은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데 남성에 대한 타자로, 제2의 성으로 길러진다는 것입니다. 남성 성기의 결핍을 비인간으로 본 것이죠. 이 책이 씨네 페미니즘에 지대하게 영향을 미친 부분은 ‘타자로 길러지는데 어떻게 길러지는가’에 대한 답을 문화로 본 거예요. 아름다운 고전, 시, 음악, 인형놀이, 일상적 성희롱과 성폭력의 문화. 사적 영역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공기와도 같은 문화를 통해 그렇게 된다고 합니다. 내면화가 무서운 것이죠. 보부아르는 제2물결에 엄청나게 영향을 미쳤고, 제2물결과 함께 씨네 페미니즘이 등장합니다. 


그 당시 씨네 페미니즘은 대중문화를 악마화했어요. 여자를 인형처럼 만든다는 비판이에요. 헐리우드의 고전적 내러티브 영화의 핵심은 남성의 성장 서사입니다. 60~70년대 페미니스트들은 그것들을 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실천했어요. 이 당시 페미니즘 대중문화 비평은 모든 쾌락을 죄악시했고, 페미니즘과 대중문화에 괴리가 있었어요. 


보부아르는 사회적 성으로서의 젠더 개념을 갖고 있었어요. 그러나 1950년대까지는 젠더라는 용어가 없었습니다. 성의학자인 로버트 스톨러의 <섹스와 젠더>라는 책에 ‘젠더’ 용어가 처음 등장해요. 1950,60년대 성의학자들이 의학적으로 지정된 성별과 나의 정체성이 맞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시작했어요. 페미니스트들이 성기와 정체성이 운명적으로 맞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하고 싶었는데 젠더라는 용어에서 그것을 찾았습니다.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은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확장되어 왔는데요. 젠더도 마찬가지에요. 


주디스 버틀러가 쓴 <젠더 트러블>은 비판적으로 볼 부분도 많지만 여전히 영감을 줍니다. 미국은 1970년대 반전, 평화, 히피 등을 거처, 1980년대에 보수화되죠. 레이건과 대처가 전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를 견인하면서 백래시 시대가 열립니다. 레이건 정부는 이미지 정치에 능했거든요. 예를 들어, 흑인 싱글 여성을 복지의 여왕이라는 이미지로 포장한 사례가 있어요. 캐딜락을 탄 흑인 이미지를 내세워요. 신자유주의는 작은 정부와 민영화를 추구하죠. 복지비를 받아서 캐딜락을 탄다는 사기꾼 이미지를 만들고, 복지는 거지들이나 좋아한다는 인식을 형성합니다. 더 심각했던 건 성소수자 탄압과 에이즈 에피데믹(AIDS Epidemic)이었어요. 실체 파악이 되지 않은 전염병 공포를 활용해서 성소수자를 탄압했던 겁니다. 국가의 방치 하에 매우 많은 게이, 남성 동성애자들이 사회적 죽음에 이르렀어요. 미국 케어커뮤니티가 에이즈를 이해할 수 있는 병으로 만드는데 큰 노력과 시간이 들었습니다.  


<젠더 프러블>의 핵심은 젠더가 섹스에 선행한다는 거에요. 버틀러는 ‘섹스가 없다’고 합니다. 남자, 여자로 나뉠 수 없는데 성기에 따라 자의적으로 나누며 여성됨과 남성됨을 학습시키고, 학습된 행동들을 수행함으로 점점 여자, 남자가 되어간다는 주장이에요. 성은 다 문화적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엄청나게 공격을 받아요. 많은 퀴어 활동가들이 호르몬은 명백하게 있다고 이야기 하거든요. 문화적으로 모든 것을 규정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요즘 담론들은 생물학자들과 협업하기도 하고 생물학자들이 쓰기도 해요. 성차를 고려하면서, 세계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성차가 있으므로 성별 이분법은 신화라고 합니다. 실존하는 성차들이 갖는 기질의 나다움을 무화하지 않으면서 다양성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거예요.   




<출처: 익스포스 필름> 


<모어>는 드래그 아티스트 모지민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에요. 첫 장면이 ‘트렌스’에서 하는 드래그 퍼포먼스인데요. 이일하 감독은 지하 클럽 안에 있는 사람이 밖으로 나와서 더 빛나는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해요.  


이일하 감독의 위치에서 퀴어 뮤지컬 장르가 중요합니다. 그는 작품을 3편 만들었어요. 첫 작품이 <울보 건투부>라는 다큐에요. 동경에 있는 제일 조선인 고등학교 권투부 동아리 사람들을 찍은 건데요. 그 당시 일본에 극우 정권이 들어서면서 제일 조선인 학교를 지원하지 않았거든요. 조선 혐오와 권투부 이야기를 같이 보여줍니다. 울보 권투부라는 제목 설정이 재미있죠. 일본 만화의 학원 스포츠물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어요. 


두 번째 영화는 <카운터스>에요. 비운의 다큐입니다. 재특회(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와 싸우는 혐한과 일본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운동이 카운터스에요. 이 시민모임이 끝까지 싸워서 일본에 혐오표현 금지법을 만들어요. 그 안에 오토코구미라는 남자 조직이 생기는데 그 조직을 만든 사람이 다카하시라는 전직 야쿠자에요. 가짜 남자에 가짜 우익이 혐오를 판다며 위협적인 야쿠자 남성성을 보이면서 혐오세력을 쫓아내죠.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것에 대한 질문을 던져요. 학원 폭력물 장르로 신나고 경쾌하거든요. 결과적으로 다카하시가 영웅적으로 그려져요. 마지막에 여성 활동가가 그가 멋있다고 말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거든요. 그래서 당시에 별로라고 평가했었어요. 남성성의 영웅화는 학원 영웅물 재현의 한계에요. 한국에서 개봉했는데 미투가 터졌어요. 다카하시에게 성희롱 당한 사람이 문제를 제기했고, 다카하시가 심장마비로 급사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디 스페이스가 간판을 내려버려요. 


놀랍게도 그 다음에 만든 게 비수술 트랜스젠더를 주인공으로 한 모어에요. 모어는 이 사회가 요구하는 남녀 이분법에 들어가지 않고 그것으로 규정될 수 없는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카운터스>의 다카하시와 <모어>의 모지민이 맞닿아 있는 부분이 있어요. 전자는 과장된 남성성을 수행하고, 후자는 젠더를 비웃으면서 자신의 여성성을 드랙 퍼포먼스에서 극대화하는 과도한 여성성을 수행해요. 각각은 깊은 의미망이 없겠지만 두 작품을 붙이는 순간 감독의 작품 세계에서 재미있게 연결되요. 


트랜스젠더를 부정하는 페미니스트는 그런 존재 자체가 여성성을 수행해서 발목을 잡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 변이수 하사 같은 사람이 등장해서 트랜스젠더 여성으로서 완전히 다른 여성성을 보여줬죠. 트렌스젠더 여성성이 매우 다채롭다는 것을 보여줬어요. 하리수는 인간극장에서 사실 되게 털털한 사람인데 다리를 벌리고 앉으면 저게 여자냐고 해서 조심하게 되고 성격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과도한 여성성을 수행하지 않으면 여성으로 패싱되지 않는 거죠. 


모지민씨와 파트너를 보면 내가 누구를 만나는가와 나의 젠더 정체성이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젠더 정체성과 섹슈얼리티는 완전히 다른 문제거든요. 차이는 차이일 뿐인데 차이가 차별을 만들어 냅니다. 차이가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것이 권력이고요. 제국주의에서 식민지 수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피부색의 차이를 차별화했죠. 식민지 수탈은 인간은 평등하다고 한 계몽주의와 함께 시작됐어요. 여기서 벗어나는 비인간을 찾았고, 가시화되어 있는 피부색을 이용했죠. 


성별 이분법에 기댄 성역할 고정관념은 정확히 부르주아 개념이에요. 특정계급의 룰이죠. 부르주아 가족을 하나의 기준으로 설정하고 그것을 정상이라고 이야기함으로써 권력을 점합니다. 또한 권력을 점했기 때문에 그것을 정상으로 만들 수 있었어요. 권력이 규정한 정상에서 벗어나면 비정상화되고 박탈감을 느끼게 됩니다. 1980년대 미국은 퀴어를 비정상, 변태 취급하면서 죽도록 내버려 뒀다고 했잖아요.   




<출처: 아르테>  



<다크룸>이라는 책을 번역했거든요. <백래시>(1991), <스티프트>(1999), <테러 드림>(2007)의 저자 수전 팔루디가 쓴 책인데요. 트랜스젠더 여성이 된 아버지를 취재하고 기록했어요. 수전의 아버지는 헝가리에서 태어난 유대인인데 2차 세계대전에서 살아남아 멕시코를 경유해서 미국으로 이민을 갔어요. 헝가리가 자유화된 후 고국으로 돌아갔고, 70대에 태국에서 성전환 수술을 받아요. 이 책은 수전이 아버지에게 이메일을 받는 것으로 시작해요. 아버지는 여성이 된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첨부하죠. 그녀는 엄청나게 마초였던 아버지가 여자가 된 10년의 역사를 정리합니다. 역사적인 변화 속에서 남성성이 매우 여성성을 강조하는 여자로 변하는 것을 추적해요. 작가는 트렌스젠더로서의 여성성에 엄청난 혐오를 가진 레디컬 페미니스트인데요. 아버지가 보낸 사진을 보고 당황했을 때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나아갑니다. 소수자가 경험하는 가장 어려운 지점은 단편적인 이미지로 캡쳐되어 돌아다닌다는 것이거든요. 팔루디는 그 한 장의 이미지를 밝내기 위해서 긴 역사를 추적해요.  


독일의 성의학자인 마그누스 히르슈펠트는 퀴어 이론에서 중요한 인물인데요. 유대인이었고, 프랑스로 망명하여 떠돌다가 심장병으로 죽어요. 그가 일했던 병원을 나치가 태워버렸는데요.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요. 나치 수뇌부들이 그에게 성 관련 상담을 많이 받았었다고 해요. 그는 ‘실제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성적 변수는 거의 끝이 없다’고 썼습니다. 


핵심은 다양성이에요. 


고전 영화 내러티브에서는 남성 장르와 여성 장르가 확정되어 있어요. 일본 학원 폭력물이나 스포츠물은 남성 장르죠. 모어에서도 장르가 매우 중요하다고 이야기해요. 이일하 감독은 모어라는 퀴어한 존재의 삶을 다루기 위해 휴먼 다큐와 퀴어 뮤지컬이라는 두 개의 장르를 사용합니다. 모지민씨는 이 영화를 퀴어 다큐가 아니라 변방에 있는 소수자의 삶이라고 표현하고 싶어 해요. 드래그 퍼포먼스를 하는 사람이 자신의 삶을 퀴어로 라벨링하길 원치 않을 때 휴먼 다큐로 가게 되죠. 그리고 <헤드윅>, <라카지> 등의 드래그 퍼포먼스와 음악이 퀴어 뮤지컬적 성격을 보여줍니다.   




<출처: 모호필름>



한겨레 칼럼에 <포기 못할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헤어질 결심>에 대한 영화평을 썼거든요. 젠더 재현 문제에 방점을 찍고 이야기를 풀었어요. 서로 존중하는 진정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 단정하게 해석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의 맥락이 있어요. 박찬욱의 작품 세계 안에서의 해석과 그가 의도한 장르 안에서의 해석이 그것입니다.  


박찬욱 감독이 여성 영화에 관한 문제의식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한 건 <아가씨>부터였어요. 레즈비언 섹슈얼리티, 가부장제 식민지 남성성을 다뤘는데요. 가부장제가 여성을 억압할 때 그 안에서 레즈비언들이 공모하여 그 공모관계를 품은 서재를 깨부수고 손을 잡고 탈주합니다. 개봉 후 엄청난 비판이 있었는데요. 그 중에서 조해온 평론가의 비평이 설득력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여성의 신체를 남성 감독이 찍는 게 문제가 아니라 가부장제를 비판하기 위해서 레즈비언을 유토피아로 그린 것이 문제라는 것이었어요.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도 굉장히 비판을 받았어요. <올드보이>는 한국 근대성의 폭력성을 비판한 영화인데요. 예전에 그의 영화는 프로이트 이론으로 설명되었어요. 부계의 룰이 강건할 때 가능한 것이 근친상간이에요. IMF 이후 남성 가장이 경제권을 쥐고 가족과 사회에 군림할 수 있다는 상상력이 무너지는 측면이 있었죠. 아버지의 법 위에 서 있었던 근대성의 폭력성. 이것이 무너질 때 가능했던 근친상간의 욕망을 그린 영화에요. 이 작품에서 마지막에 누구나 진실을 알게 되잖아요. 그런데 딱 한명, 딸만 끝내 모르거든요. 왜 여성만이 비밀, 진실에서 소외되어 있는가라는 비판을 받았을 거예요. 


감독은 내가 여성 캐릭터를 소외하고 있었다고 각성했을 것이고 <친절한 금자씨>부터 달라졌죠. 여성영화를 찍게 됐어요. 이때부터 정서경 작가와 같이 작업하기 시작했는데요. 이런 흐름 안에서 <아가씨>가 가능했을 겁니다. 그 다음에 가져 온 영화가 <헤어질 결심이>이에요. 여성 캐릭터에 고민이 많았을 거예요. 


<헤어질 결심>은 장르에 변주를 줬어요. 느와르와 멜로 드라마를 섞으면서 느와르의 관습을 비판한 것으로 보입니다. 


필름 느와르는 위기의 남성성을 탐구하는 장르에요. 1940년대 초에 장르로서 형성되기 시작했고, 1950, 60년대에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1970년대에 소강상태였다가, 베트남전 이후 <택시 드라이버>라는 영화와 함께 네오 느와르로 부활했죠. 1990년대 중반부터 <초록물고기>, <비트>와 같은 한국형 느와르가 등장하고, IMF를 지나면서 정점을 찍습니다. 필름 느와르의 기본 서사는 내 인생을 망치는 여자, 남성을 위기에 빠뜨리는 정신병이에요. 그런데 이 서사가 영화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어요. 강남역 여성혐오 사건의 서사가 너무 비슷하거든요. 원대한 꿈을 가진 청년 남성이 여성들에게 무시당해서 정신질환을 앓다가 여성을 찔러 죽였다는 거잖아요. 이런 스토리가 신문을 타는 순간 가해자를 이해하진 않아도 왜 그랬는지를 이해하게 되요. 담론 싸움이죠. 여성혐오 살인 사건을 정신질환자의 돌출적인 문제행동이라고 이야기하는 공권력은 필름 느와르 서사와 너무 같아요. 


<헤어질 결심>은 필름 느와르의 서사를 가지고 있어요. 진실을 추구하는 남자와 마음을 알 수 없는 팜므파탈의 여자, 블랙 위도우. 그런데 일반적인 필름 느와르는 진실을 알게 되면 남성이 폭주해요. 그러나 해준은 거기서 멈추고 멜로 드라마가 시작 되죠.  


멜로 드라마는 1950년대에 미국에서 엄청 인기를 끌었어요. 1940년대 초, 남성들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여성들이 군수공장에 대거 취직하거든요. 전쟁 직후 미국 사회는 귀향하는 남성에게 직장, 가정을 주면서 보상하려 해요. 그러면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강하게 뿌리를 내립니다. 2차 세계대전은 특수 자본이 풍요로워진 시기잖아요. 국가 세금으로 남성들을 취직시켜서 가장으로 만들어 줘요. 이때 직장을 잡고 있었던 여성들이 대대적으로 해고당해요. 1950년대에 미국 여성들은 어마어마하게 억압받았고, 미국 역사상 여성들의 우울증 약 복용 비율이 가장 크게 증가했어요. 사회적으로 만들어낸 병을 여자들 개인의 문제로 치부했습니다. 그 당시의 이런 분위기는 <디아워스>, <파 프롬 헤븐>에서 잘 볼 수 있어요. 여성의 답답함을 분출할 대중문화가 멜로 드라마였고, 고통 받는 여성들의 삶에 공감하는 정조가 그 장르의 정조였어요. 


사실 <헤어질 결심>에서 서래의 시간은 스릴러의 시간인데 멜로 드라마로 해석되요. 해준과 서래의 시간이 교차하는 시점에 서래의 시점이 더 적극적으로 열립니다. 관객의 시점은 수완의 시점이지 않았을까 싶고, 처지와 사연을 이해하려 하면서 수완의 관객성에서 연수의 관객성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 같아요. 연수의 캐릭터를 퀴어 캐릭터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섞여 들어가지 못하는 여성인데, 그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남성성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남성성을 수행하는 여성은 끼워주지 않죠. 


이 영화 사용하는 언어도 흥미로웠어요. 서래의 혼잣말에서 심장은 스릴러인데 마음으로 수정하는 순간 로맨스가 되잖아요. 


박찬욱 감독은 젠더 재현과 장르라는 맥락 안에서 자기가 해 온 것을 바로 잡으려고 하면서 더 좋은 작품들을 만들어 왔다고 생각해요. 페미니즘적으로 흥미롭습니다. 






손희정 교수님 쫀쫀한 설명이 끝난 후 다 같이 이야기를 나눴어요. 가발을 쓰고 벗는 행위, 고양이 밥 때문에 죽은 까마귀, 사랑의 깊이와 방식, 영화 언어, 영상미, 문화 엘리트의 고급 취향, 인물의 대상화, 불륜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부터 재미와 감동, 첫 N차 관람, 사람들의 삶으로 들어오는 영화. 그러나 '왜 천만 흥행이 되지 않을까'까지. 수많은 느낌표와 물음표의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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